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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란 무엇인가

  • 族譜(족보=보첩)란 한 宗族(종족)의 계통을 父系(부계)중심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으로, 同一血族(동일혈족)의 원류를 밝히고 그 혈통을 존중하며 가통의 계승을 명예로 삼아 효의 근본을 이루기 위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족보의 기원

  • 譜牒(보첩)은 원래 중국의 六朝時代(육조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帝王年表(제왕연표)를 기술한 것이었으며, 개인적으로 譜牒(보첩)을 갖게 된 것은 漢(한)나라 때 관직 등용을 위한 賢良科(현량과) 제도를 설치하여 응시생의 내력과 그 先代(선대)의 업적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가 된다. 특히 北宋(북송)의 대문장가인 三蘇(삼소=소순, 소식, 소철=蘇洵, 蘇軾, 蘇轍)에 의해서 편찬된 족보는 그 후 모든 족보편찬의 표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毅宗(의종) 때 金寬毅(김관의)가 지은 王代宗錄(왕대종록)이 그 효시라 할 수 있다. 또한 사대부의 집에서는 家乘(가승)이 전해 내려왔는데, 체계적으로 족보의 형태를 갖춘 것은 조선 성종 7년에 발간된 안동권씨 成化譜(성화보)이고, 지금과 같이 혈족 전부를 망라한 족보 시조는 조선 명종 때 편찬된 文化柳氏譜(문화유씨보)로 알려졌으며 지금까지 전해온다.

족보의 종류

大同譜(대동보)
  • 같은 始祖(시조) 밑의 中始祖(중시조)마다 각각 다른 본관을 가지고 있는 씨족간의 종합 편찬된 족보이다. 즉 본관은 각기 다르되, 시조가 같은 여러 종족이 함께 종합해서 만든 譜冊(보책)이다.
族譜(족보)
  • 貫鄕(관향)을 단위로 같은 씨족의 世系(세계)를 수록한 譜牒(보첩)으로, 한 가문의 역사를 표시하고 家系(가계)의 연속을 나타내는 보책이다.
世譜(세보)와 世誌(세지)
  • 한 宗派(종파) 이상의 同譜(동보), 合譜(합보)로 편찬되었거나 어느 한 派屬(파속)만이 수록되었을 경우이며, 이를 世誌(세지)라고도 한다.
派譜(파보)
  •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어느 한 派屬(파속)만의 名·諱字(명·휘자)와 사적을 수록한 보책이다.
家乘譜(가승보)
  • 본인을 중심으로 편찬하되,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의 직계존속에 이르기까지 이름자와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 譜牒(보첩)편찬의 기본이 되는 문헌이다.
系譜(계보)
  • 한 가문의 혈통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내는 도표로서, 한 씨족 전체가 수록되었거나 어느 한 부분이 수록된 것이다.
家譜(가보)와 家牒(가첩)
  • 편찬된 형태나 내용의 표현이 아니라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 모든 譜牒(보첩)을 말한다.
萬姓譜(만성보)
  • 만성대동보라고도 하며,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 내어 집성한 책으로 족보의 辭典(사전) 구실을 하는 것이다.

족보관련 용어

始祖·鼻祖·中始祖(시조·비조·중시조)
  • 始祖(시조)란 제일 처음의 先祖(선조)로서 첫 번째 조상이며, 鼻祖(비조)란 시조 이전의 先系祖上(선계조상) 중 가장 높은 사람을 일컫는다. 中始祖(중시조)란 시조 이하에 쇠퇴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조상을, 모든 종중의 공론에 따라 정하여 追尊(추전)한 사람이다.
先系(선계)와 世系(세계)
  • 先系(선계)란 시조이전 또는 中始祖(중시조) 이전의 조상을 일컬는 말이며, 世系(세계)란 대대로 이어가는 系統(계통)의 차례를 말한다.
世(세)와 代(대)
  • 始祖(시조)를 1世(세)로 하여 아래로 내려 갈 경우에는 世(세)라 하고(내림차순), 자신을 빼고 아버지를 1代(대)로 하여 올라가며 계산하는 것을 代(대)라 한다(오름차순). 또한, 자기의 조상을 몇代祖(대조) 할아버지라고 하고, 자신은 시조 또는 어느 조상으로부터 몇世孫(세손)이라고 한다.
嗣孫(사손)과 祀孫(사손)
  • 嗣孫(사손)이란 한 집안의 宗嗣(종사=계대를 잇는 자손)를 말하며, 祀孫(사손)이란 奉祀孫(봉사손)의 준말로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자손을 말하는 것이다.
이름자
  • 요사이는 이름을 하나로 부르지만 옛날에는 여러 가지로 불렀는데, 어렸을 때 부르는 이름은 兒名(아명)이고 우리가 익히 아는 字(자)는 20세가 되면 요즘의 성년식 기원이었던 冠禮(관례)를 행하는데, 식을 주례하는 주례자가 예식을 거행할 때 함께 지어준 이름을 말한다. 또한 가문의 항렬자에 따라 족보에 오르는 이름을 항명(行名), 특별히 학문 예능등이 뛰어나 학문단체 등에서 지어주어 따로 부르는 이름을 別號(별호,또는 號)라 한다. 우리는 보통 웃어른들의 이름자를 말할 때 결례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살아 계신 분의 이름은 銜字(함자)라 하고 돌아가신 분의 이름은 諱字(휘자)라고 하며, 여기에는 이름자 사이에 字(자)자를 넣어서 부르거나 글자 뜻을 풀어서 말하는 것이 예의이다.

항렬과 항렬자

  • 항렬(行列)이란 같은 혈족사이의 世系(세계)의 위치를 분명히 하기 위한 문중율법이며, 항렬자(行列字)란 이름자 중에 한 글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여 같은 혈족, 같은 세대임을 나타내는 글자로써 돌림자라고도 한다. 선조들은 자손들의 항렬자를 만드는 배합법까지를 미리 정해놓아 후손들이 그것을 따르도록 해 놓았다.

  • 항렬은 家門(가문)과 派(파)마다 각기 다르나 대략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항렬자를 정한다.
  • 1. 五行相生法(오행상생법)으로 쓰는 경우 : 오행의 기본인 金·水·木·火·土(금.수.목.화.토)가 포함된 글자를 변으로 하여 앞,뒤 이름자에 번갈아 쓰는 경우인데 대개 이를 가장 많이 따른다.
  • 2. 十干(십간)순으로 쓰는 경우 : 甲·乙·丙……壬·癸(갑·을·병……임·계)를 순차적으로 쓴다.
  • 3. 十二支(십이지)순으로 쓰는 경우 : 子·丑·寅……戌·亥(자·축·인……술·해)를 순차적으로 쓴다.
  • 4. 숫자를 포함시키는 경우 : 일(一:丙·尤)·이(二:宗·重)·삼(三:泰)·사(四:寧)등으로 쓰는 경우.

  • 같은 시기의 항렬은 長孫(장손=종가의 후손)계통일수록 낮고 支孫(지손=지파의 후손)계통일수록 높아서, 자기보다 나이가 적어도 할아버지뻘이 되는 경우가 있어 존대어를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족보를 보는 방법

  • 족보를 보면 序文(서문=머리말)이 나오는데, 이는 자랑스러운 가문과 조상의 숭고한 정신을 고취시키고 족보 간행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강조하는 글이며, 족보의 이름은 OO譜(예를들어 庚午譜=경오보)라하여 족보 간행년도의 간지를 따 족보의 명칭으로 삼는다.

  • 본문에는 始祖(시조)와 鼻祖(비조)로부터 시작하여 가로 1칸을 같은 代(대)로 하여 보통 6칸으로 되어 있는데, 기록내용을 보면 처음에 이름자가 나오고 字(자)와 號(호)가 있으면 기록한다. 이어서 출생과 사망연도가 표시된다. 20세 이전에 사망하면 夭折(요절)이란 뜻의 早夭(조요)라 표시하고 70세가 되기 전에 사망하면 享年(향년), 70세가 넘어 사망하면 壽(수)라 하고 旁書欄(방서란)에 기록한다.

  • 諡號(시호=사후 나라에서 내린 이름)와 官職(관직)이 있으면 기록되고 妃匹(비필) 이라하여 배우자를 표시하는데 보통 配(배)자 만을 기록하며 배우자의 본관성씨와 그 아버지의 이름자와 관직이 기록된다. 또한 묘소가 기록되는데 소재지와 方位(방위) 그리고 石物(석물) 등을 표시하며, 합장 여부 등도 기록하는 것이 보통이다.

  • 더러 出后·出繼(출후·출계)라 하는 것은 다른 집으로 養子(양자)를 간 경우이고, 양자로 들어온 사람은 繼子(계자) 또는 系子(계자)라 기록되며, 서얼(庶蘖)로 入嫡(입적)되었을 경우에는 承嫡(승적)이라고 표시한다.

  • 옛날에는 女息(여식,딸)의 이름은 족보에 기록하지 않고 대신 지아비의 성명을 원용하고 지아비의 본관성씨와 자식들의 이름만 족보에 올랐으나, 요즘은 딸의 이름과 생년월일, 지아비, 자식들까지 올리는 족보가 많아졌다.

족보 사진족보를 보는 방법
요즈음 족보(族譜)를 보는 방법을 몰라 자녀들에게 집안의 내력을 설명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젊은 세대들이 족보(族譜)에 관심이 없는 것도 있겠으나, 정작 낡은 유물 봉건사상으로 도외시하는 한자(漢字)와 고어(古語)등 교육의 부재도 있겠다. 조상의 얼이 담겨있는 귀중한 보첩(譜牒)을 경건한 마음으로 모셔야 하고, 소중히 간직하기 위해서는 족보 편수하는 방법이나 구성, 체재 등 열람하는 방법을 숙지하여야한다.

아래 세가지는 족보를 보는 기본 요건이므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

1. 족보를 보려면 우선 '나(我)'가 어느 파(派)에 속해 있는지를 알아야한다.
만약 파(派)를 알지 못한다면 조상이 어느 지역에 살았고, 그 지방에 어떤 파(派)가 살았던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도 파(派)를 모를 때는 부득이 씨족 전체가 수록되어 있는 대동보(大同譜) - 예) 김해김씨대동보, 안동권씨 대동보 등 - 을 일일이 찾아 확인하는 방법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파(派)의 명칭은 흔히 파조(派祖)의 관작명이나 시호또는 아호(雅號)와 세거지명(世居地名 : 대대로 사는 고장) 등을 따서 붙인다. 족보(族譜)에서 파(派)를 찾으려면 계보도(系譜圖) 외에 세계도(世系圖)를 보아야 한다. 세계도에는 대략 분파 계도를 그려놓고 무슨 파(派)는 몇 권(卷) 몇 면(面)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2. 시조로부터 '나(我)'가 몇 세(世)인지를 알아야 한다.
족보는 가로로 단(單)을 나누어서 같은 세대에 속하는 혈손을 같은단에 가로로 배열하였으므로 자기 세(世)의 단(單)만 보면 된다. 세수(世數)를 모른다면 항렬자(行列字)로 세수를 헤아려야 한다.
3. 항렬자와 보명(譜名:족보에 기록된 이름)을 알아야 한다.
예로부터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나 호적에 올린 이름에는 항렬자를 넣지 않았더라도 족보에 실을 때는 반드시 항렬자를 넣은 이름을 기재했으므로 이를 알아야 한다.

족보 현황

우리나라의 족보현황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 할 정도로 가장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 있으며, 보학의 宗主國(종주국)으로 꼽힌다. 따라서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실정이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系譜學(계보학) 자료실에는 많은 종류의 족보가 소장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열람하고 있으며, 근래에는 대전에 족보 전문도서관이 생겨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그런데 한글세대가 자라면서 한문으로 된 족보가 읽혀지기 어렵게 되자, 각 가문에서는 족보의 한글화 작업을 서두르고 있으며, 아울러 간지를 서기로 환산하거나 사진의 컬러화와 체재의 단순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여러 뜻있는 학자들이 학회를 결성하여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체계적인 학문으로 발전시키고 있으며, 한글세대들에게 적합한 현대적 감각으로 족보를 개편하여 모든 이들이 실용적으로 열람할 수 있도록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다.

외국의 족보현황
족보는 한국이나 동양의 일부 국가에만 있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은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족보제도가 있다. 많은 나라에 族譜學會(족보학회)가 있으며, 족보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도서관이 있는 나라도 있다.

  • 미국의 족보전문 도서관에는 족보자료가 마이크로필름화되어 있으며 族譜學會(족보학회)가 창립된지도 80년이 넘어, 많은 학자들이 국제화를 통하여 족보에 대한 여러 가지 세미나를 하여 의견을 수렴 하고 있다. 특히 하버드 대학에서는 한국의 족보제도를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의 족보들을 모두 필름으로 촬영하여 보관하고 있다. 미국 유타주의 각 대학에서는 계보의 작성법을 학과에 편성해 놓고, 교과로 배우고 있으며 연구발표회도 활발히 진행중이다.
  • 이외에도 일본의 동경대학과 경도대학, 중국의 남경도서관과 중국과학원, 북경도서관, 프랑스의 극동학원, 베트남의 국립도서관 등에 동양의 족보가 보존되어 있다.
  • 외국에서 쓰는 족보의 명칭을 살펴보면, 중국에서는 宗譜(종보)라 하며, 상류계층에만 족보가 보급되어 있는 일본에선 家譜(가보)라는 이름을 많이 쓰고, 서구에서는 Tree of Family(가족의 나무) 또는 Family Genealogy(가계)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성씨의 기원

  • 성씨(姓氏)란 이름자의 첫글자를 말하며 "홍길동" 이라고 할때 홍(洪)자를 말하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surname라고 하여 "존 F. 케네디"라고 할 때 케네디를 말한다.

  • 姓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이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류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원시사회는 혈연을 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 모계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었고, 모계(母系)건 부계(父系)건 원시사회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시사회를 씨족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씨족사회도 시대가 흐르고 인구가 증가하고 대(代)가 멀어짐에 따라 자연히 같은 씨족 중에도 혈통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되어 여러 개의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자 자연히 가까이 있는 씨족들끼리 서로 합하여 더 큰 사회를 조직하고, 생산물을 교환하고 외적을 방어하였는데, 이러한 사회를 우리는 부족사회라 한다. 이와 같이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원시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하였다.

  •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거주하는 지명, 산명, 강명으로 성을 삼았다.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강씨(姜氏)라 하고, 황제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살았으므로 성을 희씨(姬氏)라 하였다.

  •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성씨가 발생하였는데 고구려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이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백제는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 되어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의 기원은 신라에서 연원한 것이 많다. 박(朴), 석(昔), 김(金) 3성의 전설이 전해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내렸다. 우리는 7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직 성씨가 쓰이지 않았다. 성씨가 쓰이기 전에 신분을 표시하는 역할을 했던 것은 그 사람의 출신지이다. 신라시대의 성씨로는 3성과 6촌성 외에 9세기 초 당나라에 갔다 온 후 청해진 대사가 된 장보고가 처음 장씨로 등장하였고,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러서야 많은 새로운 姓의 등장을 보게 된다.
    고려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작 업과 함께 성을 하사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9년(1055)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 때까지도 성을 쓰지 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조선시대와 현대
    조선 초기 성은 양민에게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 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 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아졌다.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보면 1486년(성종)에 편찬한 『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성, 영조(21대)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 1908년(고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많은 숫자는 고문헌에 있는 것을 다 넣었기 때문)으로 되어 있으나,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성,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 1985년 인구및주택 센서스에서는 275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일제하에서는 한국인이 성씨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면서 동향을 파악하기 위하여 각 성씨별로 족보를 편찬하면 반드시 총독부 경무국 사찰과에 동 편찬된 족보를 납본해야만 보급토록 하는 등 식민지 통치 차원에서 족보를 납본 받아 보관하였다. 또한,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내선일체와 황국 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며 1939년에 시행한 창씨개명 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이름을 다시 찾을 때까지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 큰 수난기였다. . 최근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2003년 발표)에서는 286개 성씨(귀화인 제외), 4,179개 본관 으로 ’85년 이후 신규 성씨는 없으며, 신규본관은 15개로 나타났다. 2000년 조사에서 새로이 발견된 11개 성씨도 실은 ’85년 이전부터 있었던 京(경), 氷(빙), 杉(삼), 肖(소), 葉(엽), 乂(예), 宇(우), 苑(원), ?(즙), 增(증), 曾(증) 성씨이다. 귀화인의 성씨는 442개로 중국계 83개, 일본계 139계, 필리핀계 145개 및 기타 75개로 조사됐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姓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이것이 언제부터 발생 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인류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 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원시 사회는 혈연을 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 모(母)만 확실히 알 수 있고 부(父)는 알수 없는것 이었다. 그러므로 처음에 모계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이른바 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었거니와, 모계(母系)사회건 부계(父系)사회건 원시사회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시사회를 씨족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씨족사회는 씨족전원이 힘을 합하여 수렵, 어로, 농경에 종사하고 외구의 침입도 공동으로 방어하였다. 그리고 씨족사회는 그 집단을 통솔하기 위하여 씨족원 중에 가장 경험이 많고 덕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씨족장으로 삼고, 큰일이 있을 때에는 씨족회의를 열어서 결정하였는데, 이 씨족회의는 자못 민주적이어서 씨족원은 누구나 다 동등한 자격으로 참석하고 씨족 전원의 찬성으로 결정하였다. 씨족사회도 시대가 흐르고 인구가 증가하고 대(代)가 멀어짐에 따라 자연히 같은 씨족중 에도 혈통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되어 여러개의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자 자연히 가까이 있는 씨족들끼리 서로 합하여 더 큰 사회를 조직하고, 생산물을 교환하고 외적을 방어 하였는데, 이러한 사회를 우리는 부족사회라 한다. 부족사회에서는 씨족장들이 모여서 부족장을 선출하고 부족국가를 형성하였으며, 부족국가는 다시 부족 연맹체를 조직하고 부족연맹의 왕을 선출하여 국가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은 오늘날 사회학, 역사학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같이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원시 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 산명, 강명으로 성을 삼았다.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강씨(姜氏)라 하고, 황제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살았으므로 성을 희씨(姬氏)라 하였으며, 순(舜)임금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었으므로 성을 요씨(姚氏)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姓氏란 이름자의 첫글자를 말하며 "홍길동" 이라고 할때 洪자를 말하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surname라고 하여 "존 F 케네디"라고 할때 케네디를 말한다.

    삼국시대의 성씨발생
    • 고구려
      •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에 고(高)씨라고 하였으며, 주몽은 충신들에게 극(克)씨, 중실(仲室)씨, 소실(小室)씨를 사성하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또 유리왕이 사성 하였다는 위씨,우씨 또는 대무신왕이 사성 하였다는 낙, 부정, 대실씨 등은 전설이라고 하더라도 대무신 왕때의 을두지, 송옥구를 비롯하여 이후 재상급만도 목도루, 고복장, 명림답부, 을파소, 고우루, 명림어수, 음우, 창조리,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등의 이름이 있으며, 또 한 왕비나 왕모의 성으로 예, 송, 우, 연, 주씨 등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중국 한서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 때에 장수왕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 하였으며,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고익, 마루, 손참구, 동마 등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씨 중에서 고구려에 연원을 두는 성씨는 극히 드물다. 고씨는 고주몽의 후손이 강원도 횡성 지방에 약간 산재한다고 전해지고 그 외의 고씨는 모두 탐라 고씨계이다. 오직 강씨가 고구려의 장군이었다는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있다.
    • 백제
      • 또한 백제에서는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나 중국의 후한서, 삼국지, 진서에는 왕명이 기록 되어있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어 있으며, 진서, 송서 등의 기록에는 근초고왕(13대) 부터 위덕왕(27대)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29대)부터 부여(扶餘)씨로 기록하였다.
        또한 온조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 건국에 공을 세우고 십제 공신이 되었다는 전섭과 마여를 원조로 하는 전씨와 마씨가 있다.
        개루왕때 인물인 도미를 선계로 하는 성주도씨가 있으며, 백제가 망하자 당나라로 망명하여 당 고종으로부터 새로 사성받고 웅진도독이 되어 귀국했다는 부여융을 시조로 하는 부여서씨가 있다. 이 외에 백제 8대 성과 같은 성으로 진씨,연씨,국씨가 현재도 있기는 하나 그 연원이 분명치 않다.
    • 신라
      •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의 기원은 아무래도 신라에서 연원한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박,석,김 3성과 이,최,손,정,배,설의 6촌성에서 연원을 찾는 것이 더 합리적 일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박(朴), 석(昔), 김(金) 3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년(32)에 육부(六部)의 촌장에게 각각 이(李), 정(鄭), 손(孫), 최(崔) , 배(裵), 설(薛)씨의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7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직 성씨가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으며, 성씨가 쓰이기 전에는 신분을 표시하는 역활을 했던 것은 그 사람의 출신지이다. 다만 왕실에서는 24대 진흥왕 때부터 김씨를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가령 [양서],[신라전]에는 신라왕 모태가 처음 사신을 보내왔다'고 나와 있는데, 모태란 23대 법흥왕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북제서]에는 법흥왕 다음 임금인 진흥왕을 김진흥, 진평왕을 김진평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왕실의 김씨를 제외한 그 밖의 6촌성들은 그보다 훨씬 뒤인 중기에야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 다만 가락국의 시조로 알려진 수로왕의 12대손인 김유신은 제외이다. 김유신은 누이가 태종무열왕의 비가 되면서부터 김유신이 처음으로 김씨를 사용하게 된것 같다는 설도 있다.

      • 신라 시대의 성씨로는 3성과 6촌성 외에 9세기 초 당나라에 갔다온 후 청해진 대사가 된 장보고가 처음 장씨로 등장하였고,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러서야 많은 새로운 姓의 등장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이 삼국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다시 추정해 보면
      • ▶ 고구려는 장수왕시대(413~490)부터, 고(高), 을(乙), 예(芮), 송(松), 목(穆), 간, 주(舟), 마(馬), 손(孫), 동(董), 채, 연(淵), 명림(明臨), 을지(乙支) 등이 사용되었으며
      • ▶ 백제는 근초고왕시대(346~375)부터,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의 팔족과 왕, 장, 사마, 수미, 고이, 흑치 등
      • ▶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것으로 기록에서 추정한다.

      • 박, 석, 김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비 등이있고, 왕실의 성인 고(高),여(餘),김(金)을 쓴 사람이 가장 많았다 삼국시대에도 성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 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고려시대의 姓
    이 중에 고려 태조의 부장인 홍술, 백옥, 삼웅산, 복사귀는 고려 태조를 추대한 개국공신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의 초명으로서 그들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으로 개명한 것은 고려 건국 후 그들이 귀하게 된 뒤의 일이며, 아마 태조로부터 사성되었을 것이다.

    고려 태조는 사성한 예가 많이 있다. 지금의 강릉지방을 관장하고 있던 명주장군 순식(順式)이 귀순하자 태조는 왕(王)씨의 성을 주고, 발해 태자(渤海太子) 대광현(大光顯)이 귀순하자 또한 왕(王)씨의 성을 주고, 신라인 김신(金辛)이 태조를 보필하여 공이 많음에 권씨(權氏)의 성을 주어 안동권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또 ≪동국흥지승람(東國興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개국한 뒤 목천(木川)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우(午), 마(馬), 상(象), 돈(豚), 장(獐),과 같은 짐승의 뜻을 가진 성(姓)을 주었는데, 뒤에 우(午)는 우(于), 상(象)은 상(尙), 돈(豚)은 돈(頓), 장(獐)은 장(張)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다. 이것은 어떻든 고려 초기부터 성을 쓰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 귀족, 관료 계급은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문종(文宗) 9년(1055)에 성을 붙이지 아니한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자격을 주지 아니하는 법령을 내린 것을 보면, 문종시대까지도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종 9년의 이 법령은 실로 우리나라 성의 한 시기를 긋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성이 보편화 되었으나, 노비 등 천인 계급에 이르러서는 조선 초기까지도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조선시대 이후의 姓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 까지도 보편화 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09년 새로운 호적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洞)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 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성씨의 종류 수가 더욱 늘어났다. 따라서 1930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성씨가 많았졌다.
    우리나라 성의 수
    1486년 (성종)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277성
    영조(21대)에는 편찬한 "도곡총설"에는 298성
    1908년 (종)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는 496성
    1930년 국세조사에는 250성
    960년 국세조사에는 258성
    최근의 조사인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성

    우리나라 성의 수를 살펴 보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일제식민 통치하에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한 1939년의 창씨개명은 1945년 해방과 1946년 10월 23 일 미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에 따라 우리나라 성씨 역사의 가장 큰 수난기였다. 이후에도 국제화 시대를 맞아 외국인의 귀화 등으로 새로운 성씨와 본관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김해김씨

최근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2003년 발표) 성씨 및 본관 집계 결과를 보면 金씨가 9,926천명(21.6%)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李씨 6,795천명(14.8%), 朴씨 3,895천명(8.5%) 등의 순이며, 상위 20대 성씨 본관별 인구를 보면 「김해 金씨」가 4,125천명(9.0%)으로 가장 많으며, 다음이 「밀양 朴씨(6.6%)」, 「전주 李씨(5.7%)」등의 순이다.
우리 고장 김해(金海)는 경남에 위치하는 고장으로 6가야 중 금관가야의 중심지였으나 680년(문무왕)에 김해로 개칭하였다. 일찍이 가락국 역사와 함께 문호를 개방한 김해김씨는 신라김씨의 알지계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어 명문거족으로 번성하여 왔다.
1> 시조 : 김수로[金首露]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김해 김씨의 연원은 [삼국유사]와 [가락 국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기 42년 3월 가락국의 아홉 촌장이 구지봉 산정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을 올리자 하늘에서 한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함께 달려가 보니 금합에 여섯 개의 알이 담겨 있었다. 이튿날 알 속에서 여섯 동자가 나왔는데 그중 맨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이름짓고 금합에서 태어났다하여 성을 김씨로 하니 그가 바로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이다. 군왕이 된 수로왕은 나라이름을 대가락으로 정하고 남천축(고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許)여인을 왕비로 맞아 10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두었다. 그후 10대 구형왕이 532년신라에 항복하고 상등의 작위와 가락을 식읍으로 하사받았으며, 그의 아들 무력(武力)이 각간을 역임했다. 구형왕의 증손 유신(庾信)은 신라 무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명장으로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과 혼인하여 김해 김씨의 세계(世系)를 이었다. 김해 김씨는 중시조 유신(庾信) 의 후대에서 가세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개 파(派)로 분파되었으며, 그 중에서 경파(京派)와 사군파(四君派)·삼현파(三賢派)· 문경공파(文敬公派)의 후손들이 가장 많다. 각 파별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경파(京派)의 파조인 목경(牧卿)이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세워 김녕군에 봉해졌으며, 목경의 맏아들 보(普)의 6세손 영견(永堅),·영서(永瑞),·영정(永貞),·영순(永純) 4형제가 빼어났다. 사군파(四君派)에서는 파조인 익경(益卿)의 손자 진문(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 를 거쳐 대제학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추(錘)는 도총관을, 넷째 아들 석(錫)은 찬성사를 지냈다. 한편 진문(振門)의 6세손 극희(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완(完)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1일세조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 극일(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의 아들 맹(孟)은 밤에 용마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 기손, ·일손 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 로 일컬어졌다. 1486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일손(馹孫)은 김종직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춘추관의 사관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 이극돈의 비행을 사초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이 등극하여 [성종실록] 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일손은 참수 당하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죽은뒤에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의 목을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 되었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大有)는 일손의 조카이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에 숙부 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풀려나와 청도의 운문산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일손의 증손 언유(彦諭)는 고양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비(碑)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군때 폐모론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그 밖의 인물로는 중국어에 능통했던 덕승(德承), 삼도 수군통제사 예직(禮直), 조선 풍속화의 조종 홍도(弘道)가 유명했고, <해동가요> 를 남기고 [청구영언]을 편찬한 천택(天澤) 등이 명문거족의 김해김씨를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남한에 총 892,328가구, 3,767,0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
전남 진도군 일원, 광산군 일원, 광산군 일원 / 전남 해남군 일원, 신안군 일원 / 전남 영광군 일원 / 경북 영일군 일원, 금릉군 일원 / 경남 창원군 일원 / 함남 북청군 일원
귀지봉 사진
  • 귀지봉
김수로왕의 탄강지로 가락국의 9촌장들이 귀지봉에 올라 기도한후 6개의 알이 담긴 황금함이 내려왔던 곳이다 경남 김해시 구산동 소재

희귀한 성씨

  • 희귀 성씨에는 잘못된 통설도 적지 않다. 흔히 ‘천방지축마골피’를 천계(賤系)의 대표인 것처럼 말하지만 근거가 없다. 먼저 ‘축씨’와 ‘골씨’는 1985년 조사 때의 275개 성씨 중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천씨는 ‘하늘 천(天)’자와 ‘일천 천(千)’자를 쓰는 두 경우가 있다.
    천(天)씨는 조사에 따르면 밀양 등 5개 본관에 1351명이 있는데, 조선 정조 때 천명익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으로 봐서 천계는 아니다. 영양 천씨(潁陽 千氏)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군으로 온 귀화 성씨로서 중시조 천만리가 자헌대부와 화산군에 책봉 받았으니 이 또한 천계가 아니다.
    방씨도 대표격인 온양 방씨(溫陽 方氏)의 경우 중간 시조로 알려진 방운이 고려 성종 때 온수(온양)군(君)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남양 방씨(南陽 房氏)는 고려 때 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을 역임한 방계홍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으며, 개성 방씨(開城 龐氏)도 고려 때 원나라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온 원나라 벼슬아치 방두현을 시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천계는 아니다.
    지씨의 대표격인 충주 지씨(忠州 池氏)는 지용수(池龍壽)가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일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조선 시대 때는 문과 급제자 10명을 배출했다는 점에서 역시 천계가 아니다. 호사가들이 악의적으로 만든 것이 통설이 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례에 불과하다.

  • 일제하에서 한국민 동향을 정찰할 목적으로 족보를 납본 받아 보관한 것이 현재의 국립중앙도서관 족보이다. 일반 국민들이 접근 불가능하였던 조선왕조실록 등 선대 분들의 행적이 일제하에 일부 알려지게 되자 각 성씨들의 족보 발간이 일대 유행처럼 번져 우후죽순처럼 족보를 편찬하게 되었고, 이 때 일제 고등경찰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근거없이 지어내 주민들에게 퍼트린 말들이다. 그럴듯하게 들리자 유식한듯한 일부 몰지각한 식자층에서 인용한 말이 즉 천방지축마골피' 이다. 이 말은 크게 신경 쓸 말이 못되며 일본인들의 한민족 이간책으로 지어낸 말임을 다시한번 되새기면서 민족의 단결을 해치려는 술책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 두 글자 이상을 쓰는 복성(複姓) 중에는 남궁(南宮)·독고(獨孤)·사공(司空)·선우(鮮于)·제갈(諸葛)·황보(皇甫)씨 등 비교적 많이 알려진 성씨 외에 강전(岡田)·장곡(長谷)·서문(西門)씨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성씨들이 있다. 이 중 서문씨를 예로 들면 안음 서문(安陰 西門)씨는 1985년 조사 때 2328명이 조사되었는데, 공민왕 때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들어온 서문기가 안음군에 봉해지면서 본관이 되었다. 발음이 희귀한 성씨로는 궉씨가 있다.
    조선시대 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순창에 궉씨가 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며 중국의 성이라고도 한다’는 기록이 있고, 실학자 이덕무의 앙엽기(葉記)에는 ‘선산에 궉씨촌이 있는데 선비가 많다’는 기록이 있다.
    조사에 따르면 선산, 순창, 청주의 세 본관과 243명이 있다. 인구가 100명 이하인 극희귀 성씨들도 적지 않다. 사(謝)씨는 진주와 한산의 두 본관이 있는데, 1960년에 19명이 있었으나 1985년에는 4가구에 30명으로 늘었다. 삼가 삼(三嘉 森)씨는 1930년 국세조사 때는 나타나지 않은 성씨인데 1985년에는 85명이 확인되었다. 연풍, 전주, 한양의 세 본관에 66명이 있는 애(艾)씨는 1930년 국세조사 때도 있던 성씨이다. 조사 때 80명이 확인된 파평 옹씨(坡平 雍氏)는 원래 순창 옹(邕)씨였는데 1908년 민적 기재 때 옹(雍)씨로 잘못 기재되었다고 전한다.
    탄(彈)씨는 조사에 따르면 진주, 해주의 두 본관에 94명이 있는데, 증보문헌비고 등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구한 말 무관학교 교관 중에 탄원기(彈元基)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전부터 실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희천 편(扁)씨는 조사에 따르면 68명이 있는데,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난 성씨로 충북 옥천에 1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 외에 51명의 연안 단(單)씨와 36명의 한산 단(端)씨 등이 있다. 조사 때 정확히 100명이었던 교동 뇌씨(喬桐 雷氏)는 강화도 교동이 연산군을 비롯해 여러 선비들의 귀양지였다는 점에서 귀양 갔던 선비의 후예로 추측된다.